
1. 훔친 서문
재능은 빌리고, 천재는 훔친다.
– 오스카 와일드
아마 글이 아닌 음악이었다면 이 인용은 무단 샘플링이라 불렸을 것이다. 같은 참조라 할지라도 음악은 적법성에 민감하며, 국내에서 표절을 발각 당한 아티스트의 앞길은 늘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저작권이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도둑질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앤여왕법'이 만들어진 계기는 물론 인쇄기술의 발달에 의한 것인데, 실질적으로 이 법은 저작권의 보호 기간을 한정한 것으로 저자의 권리보다는 출판사의 독점권을 보장하는 법이었습니다. 사실 ‘앤여왕법‘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인쇄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자 권력층에서 대중의 지식이 확산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통제하고자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 WIPNEWS
(https://www.wip-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7)
‘앤여왕법’은 최초의 저작권 법령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또,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저작권법의 기원은 교회와 정부가 인쇄업자의 생산량을 규제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에 있다.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일단 만들어진 글은 필경사가 손으로 필사하는 매우 힘들고 오류가 발생하기 쉬운 과정을 통해서만 물리적으로 복제할 수 있었다. 필경사들은 흩어져서 각자 하나의 원고를 작업했기 때문에 필경사에 대한 정교한 검열 및 통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쇄술은 작품의 여러 정확한 사본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어 아이디어와 정보의 더 빠르고 광범위한 유통을 가능하게 했다. 1559년에는 금서 목록인 Index Expurgatorius가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 위키피디아 ‘저작권의 역사’ 중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copyright)
그것은 저작물에 대한 보호가 아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인쇄된 아이디어를 소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런던의 서점 주인들과 영구 저작권 지지자들은 저작권이 없으면 학문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저자들이 후손에게 재산권을 물려줄 수 없다면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을 계속 창작할 동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영구 저작권 반대자들은 그것이 독점에 해당하며, 책값을 부풀려 책을 구매하기 어렵게 만들고 계몽주의의 확산을 막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런던의 서점 주인들은 저작권을 이용하여 책 거래를 장악하려는 탐욕과 사리사욕을 숨긴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1774년 Donaldson v Beckett 사건이 상원에 상정되었을 때, 캠든 경은 관습법상 저작권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상원 의원들에게 관습법상 저작권, 즉 사실상 영구 저작권에 찬성 표를 던진다면 "우리의 모든 학문은 이 시대의 Tonson과 Lintot 같은 사람들의 손에 갇히게 될 것 "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서점들이 마음대로 책값을 정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대중이 마치 그들의 하수구 편집자처럼 그들의 노예가 될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식과 과학은 그런 거미줄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 위키피디아 ‘저작권의 역사’ 중
이런 논쟁은 저작권 발생 초기부터 지금보다도 치열하게 이어진 듯하다. 저작권이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통념이 지배적인 현재에도 문제는 다르지 않다. 미술품, 음악, 영화에 대한 권리로 가장 큰 수혜를 보는 것은 창작자가 아닌 갤러리스트, 음반사, 제작사다. 월트 디즈니 사가 로비를 통해 미국의 저작권 보호기간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시킨 소위 ‘미키마우스 법’의 입법 절차에서 얼마나 많은 창작자의 의견을 수렴했는지는 미지수다. (대한민국 역시 해당 법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작권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비직관적이고 관습에 맞지 않다. 창조는 가치를 인정받을 만큼 충분히 고통스럽고 유효하다. 유전자(gene)보다도 문화(meme)가 중요한 시대인 만큼 저작권을 통해 조금이나마 창작을 독려하는 것이 지당하지 않겠는가?
창작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 장 뤽 고다르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계에서 이런 성향의 작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스카이 호핀카를 비롯한 몇 실험 영화 계열의 감독은 비메오와 같은 플랫폼에 자신의 영화를 무료로 배포하는가 하면, 자신의 영화를 불법으로 보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도 종종 잇따른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 슬로건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당신에게 쓸모가 있다면 사용하라. 환경설정에 들어가는 모든 R&D는, 당신이 복사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제 당신이 누릴 유산의 일부분이다.” 당신의 탈것을 생각해 보자. 슬로건대로, 당신은 “바퀴를 다시 고안”하지 않고도 바퀴를 당신의 재산에 추가했다. 그것이 자연이 수십억 년 동안 해온 일이다. 그렇게 해서 자연은 좋은 설계 특성들을 이 행성의 모든 곳으로, 구석구석 빠짐없이 확산시키고 명확히 하고 제련해왔다. 이 무시무시하게 엄청난 창조력은 상상도 못할 만큼 낳은 베끼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다니엘 데닛,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바다출판사, 신광복 옮김
누군가는 애당초 문화와 인류를 지탱한 대물림의 동력이 베끼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무언가 전승하고 발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훔친다. 당신이 만약 공연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려 할 때 코드마다 각기 다른 사람에게 특허가 부여되어 있어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마술처럼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럴 바에 차라리 음악을 등지고 살 것이다. 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대중음악사에 가사 한 줄이나 몇 마디 선율로 표절 시비가 붙은 사례는 적지 않다. (존 레논이 ‘Come Toghether’에서 인용한 척 베리의 ‘You Can’t Catch Me’의 한 구절이 그렇다. 존 레논은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보고 저작권을 음반사를 위해 커버 곡을 발매한다. 비틀즈는 표절과 관련한 유의미한 에피소드를 하나 더 남겼는데, 유명한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 표절 시비는 법정으로 하여금 ‘무의식에 의한 표절’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저작권과 표절의 성립 요건은 너무나 자의적인 법적 잣대에 의해 결정된다.
모방자가 ‘아이디어’ 복사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 ‘표현’들을 차용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인지 선언해 줄 원리는 없다. 따라서 그 결정은 불가피하게 임시방편적일 수밖에 없다. – 미국 항소 법원 판사 러니드 핸드 (Peter Pan Fabrics, Inc. v. Martin weiner Corp., 274 F.2d 487 [2d Cir. 1960]. 위키피디아 ‘copyright’ 중 – 다니엘 데닛,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발췌, 바다출판사, 신광복 옮김)
저작권은 희미하고 불완전하며, 미학과 관련이 희박한 법적 질서임에도 간혹 음악적 질서로 여겨진다.
나는 누군가가 해적질이 영화 ‘산업’을 망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굳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글이 겨냥하고 있는 시퀀스가 애초에 그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오히려 해적질이 만들어내는 틈새를 포착하고, 그 틈새가 만들어내는 문화를 전염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한민수, <영화도둑일기>
(https://ma-te-ri-al.notion.site/1-75ced00e9ca74448a37e0a5054710b1b)
(해당 저서는 영화를 불법으로 복제하거나 자막을 제작/유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들이 영화를 불법으로 대하기 시작한 경로를 따르며 부실한 저작권의 토대를 헤집는다. 그는 그곳이 ‘무법지대’라고 말한다.)
2. 예술의 축
흔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하자. 우리는 그림을 감상할 때 그림체, 색채, 모델로 추정되는 무언가에 대한 충실한 묘사력을 파악한다. 하지만 재현에 충실한 미술은 카메라라 불리는 괴수에 의해 특이점을 맞았다. 어떤 붓이나 화가도 그 괴수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구상 회화는 외도를 꿈꾼다. 추상, 절대, 초현실 등의 숱하게 쏟아진 가치를 한 데 사로잡을 하나의 키워드로 개념이 떠올랐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고 강력하게 군림한 개념주의는 아직도 미술의 제일 키워드다. 관객이 작품을 지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개척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디어에 의한 것으로, 이보다 ‘순수’예술에 적합한 사조는 존재한 적 없었다. 어떤 사물 (레디메이드, 또는 오브제 투르베)을 전시장에 세워놓는 것만으로 예술이라 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예술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었으며, 각주를 둘러맨 비물질로 이리저리 현현했다. 일례로 뒤샹의 <L.H.O.O.Q.>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도용한 결과인데, 이때 뒤샹의 작품을 다빈치의 원작과 결부하여 이해하는 행동은 자연스럽지만, 작품이 저작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최소한 감상의 층위에서는 논외다. 당신이 법조인이 아닌 감상자라면 예술 작품에 윤리적 잣대를 기울이는 것은 반드시 작품이 특정 윤리적 난점과 충분한 연관성을 지닐 때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필 스펙터가 라나 클락슨을 살해하기 전까지 좋게 들렸던 ‘Let It Be’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 돌연 끔찍하게 들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충분한 연관성’이 존재하는 사례는 무엇인가? 환경 보호를 호소하는 한 다큐멘터리가 제작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전세기를 많이 타고 일회용품을 많이 사용한 점을 누군가 폭로했다고 상상해 보자. 대중은 금세 들끓어서 위선을 지적하고 나아가 작품을 보이콧할지 모른다. 이는 필 스펙터의 사례보다는 작품과 짙은 연관성을 보인다. 사회적 논변을 토대로 한 작품이 자기모순적일 때 사람들은 당연히 분노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다큐멘터리가 제작 과정에서 배출한 탄소와 다큐멘터리의 속성 간 관련이 명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이 논쟁적 주제를 건드릴 때 발생하는 착란이다.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고 해서 작품이 지적하는 환경 이슈가 없던 것이 되지 않고, 제작자는 여전히 작품 안에 사회 문제를 상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다. 저작권에 관련한 문제 제기는 정확히 이와 같은 식으로 전개된다. 샘플링이 적법한 절차를 걸쳤는가 아닌가 하는 여부는 대부분 작품을 수용하는 과정에 특별한 영향을 줄 수 없다. 이보다 확실히 논쟁이 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다른 창작물을 샘플링한 작품이 지나치게 원작과 닮은 탓에 충분한 차별점을 생성하지 못하는 상황. 이는 분명히 예술 내부의 것이다. 일반 관객이 현대 미술에 곧잘 보내는 의구심도 이런 맥락에서 나타난다. 단숨에 알아볼 수 있는 기술적 기교가 동반되지 않은 작품을 두고 우리는 쉽게 나태하다는 짐작을 내린다. 그러나 미술사에 형상이 개념을 확실히 앞질렀던 시기란 드물어 보인다. 인류학 없이 원시 미술은 이해될 수 없고, 성경 없이 중세 미술은 없으며, 탄생 (naissance) 없이는 부활 (renaissance)도 없다. 음악사에서도 중세 음악은 철저히 교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낭만주의 시대에는 음악 외의 주제를 끌어온 표제음악이 성행했으며, 지금의 팝이 콘셉트와 비주얼에 집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선형적 문화사 아래 형상 바깥의 ‘새로운 예술’에 대한 견지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3. 사례들
여기 각자 다른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에게 영화가 어땠냐고 물으니 홍콩에서 만든 호쾌한 무협영화였다고 답하고,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에서 만든 공산주의 선전물이었다고 답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극장에서 보고 나온 영상은 완벽하게 같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인 동시에 둘인 <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사례다.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상황주의 운동에 몸담고 있던 르네 비에네가 홍콩과 한국의 합작품인 무협 영화 <당수태권도> (또는 <정도>)의 영화를 통째로 빌려오고, 사운드를 지운 뒤 제멋대로 써낸 대본에 따라 더빙을 입힌 결과다. 덕분에 항일 영화는 항부르주아 영화가 되었고, 소리 소문 없이 잊힐 뻔한 영화 한 편이 강한 인상의 전위 영화로 남았다.
형상은 (귀가 나쁜 사람일수록 더더욱) 동일함에도 두 영화는 다른 가치를 성취한다. 원작은 스펙터클을 지향하는 상업적 액션 영화였고, 그것을 개조한 결과는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이고 풍자적인 전복이다. 포스트모던의 상징과 같은 뒤샹의 <샘>에서도 변기를 쓰기 위해 만드는 것과 보이기 위해 내놓는 것은 개념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언어에서 동음이의어가 차지하는 역할과 같다. 기표 (signifiant)는 같고 기의 (signifié)는 다르다.
음악의 경우는 더 극단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기호의 척도로 삼고 있는 선율은 오랜 전통에서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요한 파헬벨의 ‘캐논’을 재해석해 만든 머니 코드는 비틀즈의 ‘Let It Be’로 그 이름값을 증명하고 음악적 산업혁명을 이끌어냈다. 거의 공산품처럼 상용화된 머니 코드는 형상의 차원에서 대중음악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알 수 있는 많은 증거 중 하나이며,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노래의 문법으로 자리한다. 현대음악에서 난잡하게 해체당해야 했던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음악의 히트작은 벌스와 코러스의 반복으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 고대 질서를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콧대 높은 엘리트의 폄하를 피해 나가는 고전의 영토도 다를 것 없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루터 교회 찬송가인 코랄을 바탕으로 칸타타를 작곡하고 연주했다. 이런 복제와 재생산의 문법이 시중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표절은 이슈가 되지만, 표적이 되는 대상은 실질적 용의자의 수에 비해 지나칠 만큼 비합리적이고 우연적으로 선택된다. 특정 곡의 유사한 부분을 대조하는 표절 의혹 전문 유튜브가 있을 정도지만, 세간에서 표절로 낙인찍히는 사례와 비교하면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경우라도 대부분 주목받지 않고 지나간다. 그것이 적절한 경우에 우리는 오마주라는 방패를 꺼내들고, 그것이 풍자적일 경우 패러디라는 너스레를 떨지만, 상기 인용한 러니드 헌드의 말처럼 그 적당함의 기준선을 도대체 어디에 긋고 심판할 것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고로 법적 정당성이 아닌 예술적 가치에서는 형질의 유사성이 질적 저하를 의미한다기보다 오히려 개념의 성질이 얼마나 동어반복적인지 따져볼 일이지만, 이 개념의 성질이란 작품의 세부 사항과 작가의 전기적 특징부터 사회적 맥락까지 매우 방대해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좀처럼 없으며, 예술적 가치 역시 감상자의 자의적 잣대에 의해 결정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비평이나 저작권은 정언명령이 아니다.
4. 검열을 돌파하는 법?
2025년 화제를 모았던 시스템 서울 SYSTEM SEOUL의 두 번째 음반 <SS-POP 2>는 무단 샘플링과 관련한 논쟁을 일으켰다. 앨범은 무단 샘플링과 샘플링한 음악의 사운드에 다소 의존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현재 <SS-POP 2>는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커뮤니티나 플랫폼 유저, 타 아티스트에 의해 복제되거나 커버하여 업로드한 음원들은 존재한다. 이터널 스마일 Eternal Smile의 <Eternal Smile 1>이 그러한데, <SS-POP 2>의 앨범 커버에 모자이크를 칠한 모습으로 나타나 구성과 가사까지 도용하여 제작한 음반이다. 그러니까 시스템 서울은 도덕적 우열이나 음악적 성취와 관련 없이 마치 로스트 웨이브가 갖는 듯한 신화적 면모를 갖추었고, 그들의 추종자가 ‘그대라는 세상’, ‘러시안 룰렛’,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닌 ‘I need ㅠ’, ‘Russian Roulettte‘, ‘시간을 달리는 소년’을 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다른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SS-POP 2>의 샘플 클리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노스탤지어를 테마로 삼은 앨범인 만큼 당대 유행곡을 샘플로 삼은 탓에 저작권을 해결하러 들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따를 수 있고, 적어도 막 인지도를 쌓는 힙합 크루가 책임질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자를 독려하는 동시에 다른 아티스트의 저작 활동에 제약을 거는 저작권의 딜레마를 직면한다. 저작권의 부재는 수익 시스템의 부재로 이어져 문화 산업의 침체로 나아가는가 하면 저작권의 존재는 자본 권력 구조를 통해 검열과 차등을 생성한다.
시스템 서울에 대한 커뮤니티의 반응은 저작권 남용을 지적하는 냉소적인 어투와 음악을 지지하는 자 외에도 저작권에 대해 숙고하려는 태도와 그들의 해적에 가까운 면모를 우상화하는 입장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만 샘플링에 대한 반발 여론과 함께 시스템 서울의 음원이 플랫폼에서 내려간 것으로 미뤄보아 그들을 여전히 해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해적질은 반체제적이라는 이유로 이따금 낭만화되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싸우기보다는 일보 후퇴를 택했다. 그러니 싸우려 들지 않는 자를 더러 해적이라는 표현보다는 도굴꾼 같은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물론 그것이 시스템 서울을 유난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저작권은 너무 당연한 것처럼 거기에 존재하고, 이미 선택된 이상 그것을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본 검열을 회피하는 예술적 방법론은 좁게 오므라들었다. 몇 예술가는 작품에 대한 금전적 권리를 포기하고, 아예 작품을 파괴하거나 파괴 자체를 예술의 모티브로 동원하는 식으로 그것을 돌파한다. 경매에 내놓아진 그림을 파쇄하는 뱅크시,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여 놓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이 관객에게 집어 먹히는 해프닝, 건물과 공공장소를 대상으로 한 그래피티 등의 반달리즘은 범죄적 행위를 통해 반체제적 표현 양식을 구축했고, 미스치프 같은 아티스트는 매입한 미술품을 복제하여 모작과 진품을 섞어놓고 무작위로 판매하거나 신발에 혈액을 넣은 채 판매하는 등 체제의 원리를 비틀어 이용하는 영리한 풍자 방식을 취한다. 혹은 사회 구조 같은 거대한 소재보다 정확히 저작권의 아이러니를 지목하는 리처드 미섹의 영화 <게티이미지로 만드는 세계사>는 실제로는 퍼블릭 도메인인 영상을 기업 소유처럼 독점하여 유료 판매하는 포토 에이전시 ‘게티 이미지’로부터 영상을 매입해 무료로 배포하는 의적의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대중음악은 초기 힙합의 무분별한 샘플링과 스트리밍 정착 이전의 불법 복제 정도의 예가 있겠으나, 저작권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엄격한 태도를 취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인터넷은 현 저작권의 운용 방식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을 위해 여전히 열린 길처럼 보인다. 사운드 클라우드나 밴드 캠프를 통한 자주적 스트리밍의 가능성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덜 중앙 집권적으로 보이게) 잔존하고 밈을 통한 폭발적인 재생산과 무분별한 활용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몇 달 전에는 인터넷 아카이브에 해당하는 Anna’s Archive가 스포티파이의 메타데이터와 음악 파일을 복사해 300TB의 토렌트 아카이브로 공개하는 일도 있었는데, 스포티파이 측의 소송으로 끝내 링크를 닫아야 했다. (https://arstechnica.com/tech-policy/2026/01/annas-archive-said-spotify-scrape-didnt-cause-domain-suspension-it-was-wrong/) 눈에 띄는 점은 기술/개발 뉴스 사이트 GeekNews의 글에 따르면 “자연재해·전쟁·예산 삭감 등으로부터 영구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번 아카이브조차 “인기 지표(popularity)를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지정하여 품질에 차등을 두어 기록했다는 것이다. (https://news.hada.io/topic?id=25216) 오프라인 데이터 보관소 중 하나인 노르웨이 스발바르의 북극 세계기록보관소 (Arctic World Archive, AWA)도 데이터 보관에 상당한 비용을 요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항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역사란 어떻든 승자 독식적일 거라는 비관도 생긴다. (2024 기준 AWA의 “Icecube” 플랜: 전용 piqlFilm 릴 1개를 제공, 약 50GB~100GB 수준 데이터를 전용 릴에 기록하고 메타데이터 강화, 보존 증명서, 온라인/가상 행사 참여 등을 포함, 가격은 약 8,900유로-부가세 별도, 2026/03/15 기준 한화 약 1,526만 원)
저작권이라는 개념 앞에도 몇 가지 비관은 솟아나는 추세다. AI 사용 계획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 2023년 미국작가조합 파업이나 AI 음악 생성기 Suno와 Udio에게 몇 음반사가 소송을 거는 일 등 인공지능은 예술의 권리를 묘하게 흔들고 있다. 인간사에서조차 불분명한 저작권이 기술적 혁신 앞에서 언제까지 노동권 유지의 근간이 되어줄지는 미지수고, 학습에 의한 창작이라는 과정을 공유하는 인간과 기계의 두 지능 사이에 어떻게 차등을 부여할지는 논리가 단단하지 않다. 발전에 따라 예술 산업의 일부를 점점 더 대체해 나갈 것이 분명해 보이는 AI는 특히 음악에 이르러 소비자가 프롬프트로 요구하는 작품을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 때 인간 아티스트의 설자리를 좁게 만들고 저작권 존폐/개정 담론을 이끌어 내거나 유명무실한 규율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도 비관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저작권 논의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아닌 기술의 압도로 인한 외부 요인에 반강제적으로 이행될 것이라는 점에서 더 비관적이다. (적어도 인류에게는 그럴 것이다.) 이미 SNS를 중심으로 빠르게 커지는 중인 AI 음악과 이미지에 대한 활용 및 소비는 브레인 롯 시대의 강력한 문화적 도구로 자리매김했고, 오랜 시간 우리를 위로한 음악가는 이제 과격할 만큼 지적인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탐탁잖게 여길 것 없다. 기보법, 인쇄술, 미디, 레코드, 스피커, 이어폰 등은 신, 왕, 귀족, 후원자, 대중과 같이 늘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던 음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성장했으며, 우리는 그때마다 작곡가의 지위가 하인이건 거지이건 신경 쓰지 않아왔다. 거의 모든 음악은 이미 실용음악이었으며, 그 작자가 인간이 아니게 될지라도 우리의 삶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말장난을 보태자면, 어차피 녹아내린 뇌를 주워 담을 방법도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