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분 이내의 짧은 영상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밈이라는 문화적 코드의 번식과 확산은 물론, 일상의 공유, 제품 홍보, 작품 감상 등 수많은 활동들이 이제는 1분 남짓의 숏-폼 영상을 매개로 행해진다. 이제 숏폼은, 얼마 전까지 잡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장 가벼우면서도 자극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다. 평면의 이미지에 현재의 문화를 박제하듯 전달하던 잡지의 역할은 고스란히 숏폼으로 이전되었고, 우리는 이제 이들을 어색함 없이 매거진이라 부르곤 한다. 우후죽순으로 양산되는 인스타그램 매거진들은 이제 지면 대신 인스타그램 릴스를 영토로 삼고, 잡지라는 단어는 종이의 저출산과 함께 그 생명력을 상실해버렸다. 우리는 이제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대신 핸드폰 화면을 슥슥 쓸어올리고 있다.
그리고 여기, 아방가르드라는 흐리멍텅한 낱말이 있다. 그리고 이 낱말은 언뜻, 숏폼이라는 매체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음악의 경우를 볼까. 숏폼 챌린지를 염두에 둔 K팝, 틱톡에서 유행하는 인디 음악 정도의 수사는 심심찮게 보이곤 하지만, 숏폼 친화적 아방가르드 같은 말은 세상 어디서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숏폼이라는 매체가 의외로 전위에 개방적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사는 확실히 흔치 않은 일이다. 아방가르드가 본디 팝, popular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숏폼이 너무나도 일상화, 세속화되어 있으니 아방가르드와 숏-폼의 언어적 조합에 문득 즉각적인 거부감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물론 아방가르드 혹은 익스페리멘탈이라는 개념을 표방하는 대중음악 씬의 최근 경향성을 살펴보면, 이들의 미학적 나침반 역시 숏폼이 추구하는 생리적 미학과 반대되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Xiu Xiu와 Swans를 추종하는 포스트-록 세력들은 대표적이고, 실험주의 힙합 범주에 소속되는 예술가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JPEGMAFIA, Death Grips, Injury Reserve 등이 제시한 비정형성을 모방하거나, Earl Sweatshirt나 El-P, billy woods 등의 추상을 모티브로 삼는다. Lingua Ignota와 Uboa, Ethel Cain 등이 보여준 악마적 침강이나 Merzbow, The Gerogerigegege의 악명 높은 하쉬 노이즈는 또 어떤가? 1분 남짓의 시간적 제약을 두고 이들의 소리를 소비하는 일은 확실히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다. 이들의 음악이 숏폼 컨텐츠 내에서 다뤄진 사례야 물론 존재하겠지만, 숏폼의 형태로 ‘소비’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대체로 평면보다는 입체적 공간을 선호하며, 그 추상적 공간에 청자를 잠시 유폐시키는 일이야말로 이들의 주요 작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2020년대 아방가르드/익스페리멘탈 록을 대표할 만한 밴드 YHWH Nailgun의 음반이 숏폼 친화적이라는 사실은 짐짓 놀랄 만한 일이다. 총 11분, 10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Magazine>은, 모든 트랙의 길이가 길어야 1분 내외로, 숏폼에서 선호하는 류의 길이로 구성되어 있다. 전위적인 디쉬로 이름을 날린 신생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다음 해 메인 디쉬를 KFC 박스에 담아 서빙해 온 꼴이랄까. 만약 어떤 인스타그램 릴스 영상을 업로드하면서, 본 트랙들 중 하나를 삽입한다면 일말의 사운드 편집조차 필요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 곡들 중 몇몆은, 곡이라 칭하기 모호하게도, 가시적 구성이나 진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선율을 중간에 툭 끊어버리고는 다음 트랙으로 그냥 휙 넘어가 버린다. 마치 숏폼 영상을 아래로 넘길 때 음악이 툭 끊기는 것처럼. 혹시 이들은 숏폼의 비교적 평면적인 시공간 속에 스스로의 소리가 산 채로 박제되길 자처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대의 새로운 소비 규격 앞에 허망히 백기를 흔드는 것인가?
물론 작품은 팝보다는 팝-아트에 가까워서, 소비되기보다는 소비의 틀을 빌려 존재하길 택한다. 특정 파트 위주로 소비되는 숏폼의 룰을 순종하기라도 하듯, 이들은 소리의 아이디어를 짧게 배치시키고, 이를 더 체계적인 형태로 쌓아나가기를 철저히 거부해버린다. 학술 수준의 심층적 정보 대신 이목을 끄는 정보들을 친절하게 전달하는 매거진의 방식처럼, 아이디어 수준의 전개만 있을 뿐 그 이후의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곡 전체가 아닌 곡의 특정 파트만을 영상의 소재로 활용하여 소비하는 숏폼 플랫폼의 소비 방식과도 다르지 않다.
허나 그 안에 포함된 소리는 대단히 익숙한 종류의 것이다. 돌출된 드러밍과 노이즈, 신음이 맹렬히 융기하는 사운드는 분명 전작이자 데뷔작인 <45 Pounds>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전작처럼 각 레이어를 날카롭게 강조하기보단 비교적 낮은 위치로 규합시키려는 경향성이 관측되긴 하나, 소리를 생물처럼 분류한다는 가정하에 이들은 틀림없이 같은 종(種)으로 분류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곧, 밴드가 드러내고자 하는 자아가 <45 Pounds>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 된다. 이쯤에서 본작을 단순 팝-아트라 부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작품이 1분 내외의 극단적 구성을 택한 것은 예술적 대목적보다는 일종의 도구 혹은 퍼포먼스로써다. 그렇다면 작품을 보편의 시선에서 바라보기보단, 세속 예술의 틀을 잠깐 빌림으로써 보수화된 아방가르드에 반하는 저항적 행위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적절하다. 아방가르드를 표방하는 현대 실험주의 음악에 팽배한 구조주의와 공간성 추구를 일종의 음악적 전형성으로 규정하니, 아이디어 단위의 숏-폼 작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예술적 반항 혹은 사보타주가 된다. 입체의 관점에서 평면은, 구축의 관점에서 파편은 때때로 전위적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이 소음-잡지는 소음인가, 잡지인가? 전의를 상실한 아방가르드의 얄팍한 발버둥인가, 전위를 포기한 자들의 괴팍한 원시주의인가? 이 사소한 반항으로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들의 의중이 물론 명확치는 않으나,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본작의 YHWH Nailgun이 스스로 배치한 음향적 아이디어를 순수한 아이디어 그 자체로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들은 아방가르드를 표방하는 음악들이 주로 거느리는 그 구조적 아름다움을 일종의 사치품으로 규정하고, 이를 억지로 걷어내는 행위를 통해 어떤 본질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그 진위 여부를 떠나 <Magazine>은 일단 의심의 여지 없이 YHWH Nailgun 그 자체이며, 그들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저 <45 Pounds>와 <Magazine>, 그리고 YHWH Nailgun 그 자체를 보면 된다. 아방가르드에 사치가 없듯,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