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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의 주역에게도 그림자는 있었다. 이승윤 <0집>

by 정기엽|

cover image of 이승윤 <0집>
이승윤 <0집>마름모

어릴 적에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자라나 달성할 때 문득 한 뼘의 성장을 체감하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비싼 아이스크림을 고민 없이 먹는 식의 사소한 것에서도 물밀듯 밀려오는 파도가 있다.

Q. 초기 앨범이 음원사이트에 없는데
A. 그때만 해도 변명처럼 음악을 할 때라… 완성도가 어쨌든 정말 좋은 결과물이 아닌데도 그냥 “이쯤 하면 됐지 뭐”, “이쯤 하면 취미로 했다고 하면 칭찬 받을 거야” 하고 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제 와서 다시는 할 수 없는 생각들이 담겨 있는 앨범이고, 너무 아끼는 곡들이라서 다시 잘 만들고 싶은 생각에 ‘Honey’ 방영 직전에 (음원사이트에서)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초기작만의 느낌이 있는데, 그 아쉬움도 있으니) 유튜브엔 지우지 않고 냅뒀고요, 음원사이트에는 다시 만들어서 다시 낼 생각으로 지웠습니다.
중앙일보 ‘싱어게인’ 우승자 인터뷰 중에서

작은 성취에도 붕 뜨는 마음이 있는데, 10년 전의 작업을 마침내 완성으로 이끈 기분은 어떨까. 29곡, 듣기 전에도 숨찬 개수가 벅찬 마음을 나타낸다. <역성>을 통해 깃발을 꽂고야 만 이승윤의 서사는 설익은 소년을 다시 꺼내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치 흥행에 성공한 히어로 영화가 속편으로 주인공의 과거를 조명하듯 말이다.

3집 <역성>과 2집 <꿈의 거처>에서 대표되듯 이승윤은 웅장한 편곡을 애용한다. 10년 전 ‘방구석 음악가’이던 그가 구사하기 어려웠을 스타일이 구현된 점은 첫 트랙 ‘그림자 위로’에서부터 느껴진다. “망설임을 끝내, 뭘 그렇게 자꾸 겁내” 라는 가사 이후 휘몰아치는 2026년의 연주는 2016년에 홀로 품던 바람과는 외침의 크기부터 다르다. 곡에 서린 자신감이 거대한 열망을 표출한다. 후렴 직전의 물음 “나와 같이 숨을 쉬어 줄래?” 를 표현하는 가창이나 단촐하던 코러스와 연주의 강화된 디테일이 그간의 음악적 성장을 대변한다.

위 인터뷰에서 본인이 언급한 “이제 와서 할 수 없는 생각들”은 어쿠스틱 음악들이 주를 이루는 전반부에 더 강하게 실려 있다. 현재의 이승윤과 과거의 이승윤이 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청자에게 가닿을 메시지는 다를 수밖에 없고, 재탄생을 결심한 복각은 이 이유 때문에 안 하느니만 못한 시도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승윤은 그때의 감각을 오래도록 담아두고 있던 것처럼 ‘오늘도’, ‘가끔은’ 등에서 그 시절을 간직한 목소리를 재현했다.

잊지 않았다기보다 달라진 게 없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페스티벌 무대에서도 여러 차례 선곡한 ‘들려주고 싶었던’은 2024년에 발매한 ‘들키고 싶은 마음에게’가 전달하는 메시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11년 전 싱글 ‘어버버버’의 가사 “폭죽”, “폭주” 는 발음의 순간부터 2024년의 ‘폭죽타임’을 연상케 하니까. ‘야생마’ 같이 진취적인 면모로 이름을 알린 이승윤의 어쿠스틱 음악이 이질감 없는 이유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 있다. 싱어송라이터 역할로 뮤지컬 주연을 맡은 듯 빚어낸 감정이 돋보인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2011년 소년기를 연기하던 윤도현이 2021년 같은 배역의 중년을 맡았을 때 풀어내는 감각은 생생할 수밖에.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지나온 경험을 잊지 않았기에 ‘지식보다 거대한 우주에는’ 같은 록발라드에서 생기를 잃지 않은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음반의 첫 챕터가 지워진 음반 <무얼 훔치지>를 기반으로 <역성>의 초기 서사를 가사로 전달했다면, 두 번째 구간은 EP 및 싱글을 끌어모아 음악적으로도 명맥을 잇는다. 또 다른 타이틀 ‘뒤척이는 허울’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추가된 인트로 ‘뒤척이는 너울’과 이어지는 ‘게인 주의’는 ‘PunKanon’, ‘비싼 숙취’ 같이 많은 청자가 아는 이승윤의 강렬함에 한층 더 가깝다. 물론 익숙한 맛으로만 흐르진 않는다. 2010년대 말, 2020년 초에 세상에 꺼낸 이 음악들은 지금의 그와는 다른 풋풋한 감성을 내포한다.

몇 곡을 제외하면 버스커 버스커가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후 ‘정말로 사랑한다면’, ‘처음엔 사랑이란 게’, 로이킴이 ‘봄봄봄’으로 지탱한 당대 통기타 기반의 음악이 주를 이룬다. 본작의 ‘정말 다행이군’, ‘하품만 나오네’ 등 투박한 감성은 이승윤의 전작 사이 어쿠스틱 계열 ‘28k LOVE!!’, ‘내게로 불어와’ 같은 음악과는 결 자체가 다른데, 다소 옛것이라 느껴질 수 있는 언어는 <0집>이 애초에 복각에서 출발한 작품임을 큰따옴표 사이 새겼으니 너그러울 수 있는 포인트다.

커리어의 시작을 연 ‘없을 걸’ 같은 곡이야 15년이 지난 것이니 재편곡이 큰 변화를 상정했을 테지만 <싱어게인> 방영과 멀지 않은 EP 수록곡들은 작업의 의의가 애매한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음원도 미완이라 느끼지 않는데, 본작에 새 옷을 입고 담기는 것을 완성이라고 칭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남는다. ‘구겨진 하루를’, ‘무명성 지구인’ 같은 곡들은 해상도가 더 선명해졌을 뿐이니까.

‘새벽이 빌려준 마음’, ‘굳이 진부하자면’처럼 후주를 늘려놓은 곡들은 그래서 다르다. 전자는 3분의 짧은 시간에 담을 수 없던 프로그레시브 록스러운 연주를 양껏 선보이고, 후자는 잔잔해졌다가 짙어지는 흐름의 엔딩이 인상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구했다. 모든 곡의 러닝 타임이 늘어나고 변주가 많아졌다면 오히려 퇴색되었겠지만, 선택과 집중 끝에 변화를 보다 확실히 각인했다.

또 하나의 선택이었을 타이틀 두 곡에선 <역성>의 의지가 이어졌다. 성행하는 논리에 의문을 품고 반기를 드는 안티 히어로적인 화자의 시작점이자 프롤로그가 ‘무얼 훔치지’로, 2집의 ‘영웅 수집가’와도 비슷한 생각을 담았다. 타인을 흡수하며 자아를 찾던 이가 온전한 자신을 쟁취하는 기승전결로 서사를 한 번 더 덧댄 곡에 이어, ‘뒤척이는 허울’은 가사와 음악 모두 <역성>의 프로토타입이다. 어지러운 심리를 반복되는 후렴구로, “천체를 접붙인 왕관을 가져와도 어머 난 얼굴도 작아” 라며 부적응을 유쾌하게 풀어낸 메시지 그리고 신해철 ‘일상으로의 초대’가 떠오르는 도입부터 특유의 코러스, 질주하는 연주는 캐릭터를 더 공고히 세우는 데 일조한다.

“저는 밖으로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을 많이 어려워하는 방구석 음악인입니다. (중략) 이제 다시 슬슬 움직여보려고 하는데 기껏 내었던 용기가 다시금 두려움에 집중이 되었는지 주저하게 되네요. 그럼에도 힘을 내야겠죠. 부끄럽지만 제 노래 중에서 ‘무얼 훔치지’라는 곡을 신청해 봅니다.”
2017년 ‘푸른 밤, 이동진입니다’에 이승윤이 신청한 사연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인지도를 얻은 이승윤이기에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등에서 장르팬 특유의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이를 하대하는 반응이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2026년에 이르러 그를 인정하지 않는 시선은 거두어졌다. 올해만 해도 장르 후배들을 초빙한 자신의 공연으로 수천 명을 운집해 마침내 오랜 꿈이던 <밖>에 멋지게 발을 딛었으니까. 1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랫말들은 이런 성취를 이룬 자에게도 “나의 목소리는 언제서야 응답받게 될까요” 라 ‘푸념’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럼에도 꿋꿋이 발자국을 새기다 보면 이뤄지리란 희망을 전파한다. 네 번째 정규 앨범으로 되풀이한 초심이 의미가 깊은 이유다. 이승윤은 자신의 활동으로 한 가지 무언의 메시지를 남긴다. 굳건한 의지는 결국 시간이 증명해 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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